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티븐 제라드/클럽 경력 (문단 편집) == [[리버풀 FC]] == [[리버풀]] 근교인 하이턴[* 영국 내에서 손꼽을 정도로 치안이 안 좋기로 유명한 막장 지역으로, 하이턴 출신인 축구선수 [[조이 바튼]]은 하이턴에서 살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공격성을 지녀야 한다고 회고하기도 했다.]에서 태어나 8살의 나이에 [[리버풀 FC]] 유스 팀에 입단하였다. 1998년 18세의 나이로 리버풀 1군에 콜업되며 프로에 입문하였고, 2003년 23세의 어린 나이에 [[사미 히피아]]로부터 주장 완장을 물려받고 뛰어난 리더십으로 팀을 이끄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데뷔 초창기에는 [[라이트백]]으로 시작하여 이런저런 땜빵으로 들어가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던 시절에는 투쟁적인 태클이 일품인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이후 점차 공격적인 롤을 소화하기 시작하였다. 특급 공격수와의 시너지가 매우 좋은 선수로, 2000년 대 초반에는 [[마이클 오언]]과의 호흡이 돋보였고 이후에는 [[페르난도 토레스]]를 보좌하는 [[세컨드 스트라이커]]와 같은 롤을 소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은 공격적인 롤을 맡는 [[중앙 미드필더]]가 주 포지션. 대포알 같은 중거리 슛도 일품인데, 종종 해결사 역할을 해 주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기로는 04-05 챔스 올림피아스코스 전과 05-06 FA컵 결승전이 있다. 제라드는 어린 시절부터 슈퍼 유망주로 유명했으나 하필 파트너가 2001년 발롱도르를 수상한 원더보이 마이클 오언이라 본의 아니게 약간 가려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오언이 레알 마드리드로 떠난 04-05 시즌부터 리버풀의 진정한 에이스로 거듭나며 월드클래스 미드필더로 도약하게 된다. 04-05 챔피언스리그 당시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올림피아코스전에서 리버풀은 16강 진출을 위해서는 2점 차 이상의 승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히바우두]]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더욱 암울한 상황이 되었지만, 제라드는 코너킥 상황에서 어시스트를 하는 등 활약하였고 희망이 사라져 가던 86분에 본인 최고의 골로 자주 꼽히는 환상적인 중거리 슛으로 팀의 3번째 골을 넣어 리버풀을 16강에 진출시킨다. 이후 리버풀이 챔피언스리그에서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 [[유벤투스 FC|유벤투스]], [[첼시 FC|첼시]]를 모두 꺾는 데에 크게 공헌했다. 이 시즌 리버풀은 리그에서는 부진하며 5위에 그쳤으나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후보인 유벤투스와 첼시를 연속으로 꺾고 올라오는 저력을 보여주며 결승에 진출한다.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xYkCPNWIAAkb62.jpeg.jpg|width=100%]]}}}|| 이후 [[AC 밀란]]과의 결승전, 제라드는 0-3으로 뒤져 있던 상황에서 리세의 크로스를 환상적인 헤더로 연결해 만회골을 기록하며 분위기를 살려냈고 이후 2-3까지 따라붙은 상황에서 [[젠나로 가투소]]와의 경합 과정에서 넘어져 페널티킥을 얻어내며 3-3 동점을 만들었다.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리버풀의 승리로 마감된 이 경기는 현재까지도 [[이스탄불의 기적]]이라 불리며 챔피언스 리그 역사에 남을 역대급 결승전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 경기에서 제라드의 활약상은 절대적이었다. 또한 제라드는 역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끈 주장들 중 두 번째로 어린 나이라는 기록을 달성하였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유지 중인 기록이다.[* 1위는 1993년 UCL 우승 팀인 [[올림피크 드 마르세유]]의 주장이었던 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디디에 데샹]].] 이러한 활약으로 이 시즌 UEFA 올해의 클럽 선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되며 발롱도르 3위를 기록한다.[* 이 때 제라드의 점수는 142점으로 2위 램파드의 148점과 근소한 차이였다. 1, 2위 표에서는 제라드가 더 많았으나 3, 4위에서 램파드의 표가 더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즌 리버풀이 리그에서는 부진하면서 이적설에 휘말렸으며, 특히 시즌 전에도 제라드에게 구애했던 [[주제 무리뉴]]의 첼시가 그를 적극적으로 원했다. 이 이적설은 시즌 내내 화제가 되었는데, 제라드는 04-05 시즌 내내 첼시 이적설을 딱히 부인하지 않는 태도로 리버풀 팬들의 질타를 받았고 해설자들도 리버풀이 첼시와 경기할 때 마다 제라드의 첼시행 가능성을 언급했다. 오죽했으면 제라드가 리그컵 결승전에서 자책골을 넣어 첼시의 동점골을 만들었을 때 "저게 아마 첼시를 위한 제라드의 첫 번째 골일 겁니다!"라는 멘트까지 쳤을까. 일부 리버풀 팬들은 이 경기 패배로 리그컵 타이틀을 첼시에 내준 이후 방송 인터뷰에서 제라드에 대해 질문하자 "그 새X는 필요 없으니 첼시로 꺼져도 됩니다"라며 그를 비난했다. 거기에 첼시와 챔피언스리그 4강 대진이 형성되자 압도적인 여론이 당시 리그를 독주하던 첼시의 결승행을 예상하는 동시에 리버풀이 패해서 결승 진출에 실패한다면 제라드가 첼시로 떠날 것이라는 예측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리버풀은 이 시즌 모든 예측을 뒤집고 첼시와 밀란을 차례로 꺾으며 5번째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 제라드의 이적설도 사그라드는 듯 했다.[* 심지어 밀란 전 킥오프 직전에도 해설진이 제라드의 리버풀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다는 말까지 했다.] 실제로 제라드도 우승 이후 이적설에 대해 "어떻게 이런 환상적인 밤 이후 떠날 수 있겠는가"라는 대답을 내놨다. 하지만 첼시의 계속된 구애에 우승 이후 제라드는 결국 이적 요청을 했으며 이는 팬들의 폭동에 가까운 반응을 이끌었다. 2018년 10월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 나온 제라드의 다큐멘터리 "Make Us Dream"에 따르면 제라드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 이후 방황했다고 한다. 과연 자신이 이 팀에 더 기여할 수 있을까, 더 나은 클럽에서 리그 우승과 개인 수상을 노려도 좋지 않을까, 자신을 좋아하고 원하는 감독 밑에서 뛰어도 되지 않을까[* 라파와 제라드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라파의 차가운 성격은 제라드가 당시 가진 성공에 대한 부담감과 어린 나이에 리버풀의 주장을 역임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덜어 주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제라드의 이적설에도 라파는 그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는 스탠스였기 때문. 축구에 만약이란 없지만 라파와는 정 반대의 성향을 지닌 현 감독인 [[위르겐 클롭]] 하의 제라드는 어땠을까하는 콥들의 아쉬움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리버풀에서의 엄청난 기대와 사랑이 결국 자신에게는 독이 되지 않을까[* 실제로 제라드는 이 시즌 내내 엄청난 부담감에 잠겨 있었다. [[마이클 오언]]이 떠나자 팀의 유일한 월드클래스 선수가 되었으며, 시즌 내내 팀은 부진했고 아스날, 맨유와의 경쟁도 힘든 마당에 첼시까지 비상해 리그에서는 더더욱 리버풀이 뒷전으로 밀렸고, 본인은 24세라는 어린 나이에 리버풀의 주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는 생각과 함께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특히나 아버지 폴 제라드의 말에 따르면 팬들이 제라드의 유니폼을 불태우는 장면을 TV에서 목격하자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당시 방황하던 제라드를 도와준 것은 그의 아버지였는데, "선택은 맡기겠지만 다른 팀으로 떠난다면 그곳에선 여기 팬들만큼 너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조언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아마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마 10명 중 9명이 내 상황이었다면 첼시로 떠났겠지. 하지만 나는 그 선택을 했다면 지금쯤 매우 후회했을 것이다. 나는 10명 중에 9명이 아니라 '''10명 중 1명'''이니까"라며 내레이션하는 장면은 [[간지폭풍]]. 결국 제라드는 4년 재계약을 맺고 리버풀에 헌신하기로 결심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